경제생활
밭떼기 거부한 농부, 한국판 '테루아'를 찾다
경남 거창의 해발 550m 고지대에는 한국 와인의 새로운 가능성을 증명하는 소담한 포도밭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정쌍은 와인'은 국내 와인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위적인 단맛을 걷어내고 포도 본연의 생명력을 담아내며 애호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1대 정쌍은·임혜숙 농부의 유기농 철학과 2대 정규송 농부의 내추럴 양조 기술이 만나 탄생한 이 와인은 연간 9,000병이라는 적은 생산량에도 불구하고 매번 품절 사태를 빚고 있다.대다수 한국 와인이 설탕을 첨가하는 보당 과정을 거쳐 과실주에 가까운 단맛을 내는 것과 달리, 정쌍은 와인은 드라이하면서도 상쾌한 산미를 자랑한다. 정규송 농부는 이러한 맛의 비결을 거창의 독특한 자연환경, 즉 '테루아'에서 찾는다. 철분이 풍부한 화강암 토양과 높은 해발고도에서 비롯된 큰 일교차는 포도의 산도를 높이고 풍미를 진하게 만든다. 여기에 지역 막걸리 장인으로부터 전수받은 발효의 지혜가 더해져 한국적인 내추럴 와인의 정체성이 완성되었다.

국내 와인 산업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받던 유통 구조의 한계도 정면으로 돌파했다. 상인들이 밭 전체를 한꺼번에 수확하는 '밭떼기' 방식은 포도의 숙성도를 무시하게 만들고, 결국 부족한 맛을 설탕으로 가리게 되는 악순환을 낳았다. 하지만 정씨 일가는 포도 재배부터 와인 병입까지 전 과정을 직접 관리하며 품질을 통제했다. 기후 탓에 맛있는 와인을 만들 수 없다는 편견은 결국 재배와 양조의 분리라는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이들의 분석이다.
가족의 남다른 고집은 양조 방식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농약에 민감한 아버지를 위해 시작한 유기농 농법은 이제 와이너리의 핵심 가치가 되었으며, 보존제인 아황산조차 일절 넣지 않는 내추럴 양조를 고수한다. 화학 약품 없이 의도한 맛을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정규송 농부는 해외 메이커들과 소통하고 독학을 거듭하며 기술적 난관을 극복해냈다. 가족이 마시는 술에 약품을 넣을 수 없다는 순수한 마음이 집요한 연구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들의 와인 사업은 처음부터 거창한 계획 아래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포도로 가족끼리 나눠 마시던 술이 입소문을 타면서 지자체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2007년 '거창포도주'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이후 아들 정씨가 합류하면서 제품군이 다양화되었고, 아버지의 이름을 딴 현재의 브랜드로 재탄생하며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공무원 생활을 접고 흙으로 돌아온 아들의 결단이 지역 와이너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셈이다.
정규송 농부의 지향점은 화려한 명성보다는 대중들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쉬운 와인'에 닿아 있다. 서민들이 일상에서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있으면서도, 자신의 미각이 허용하는 한 가장 뛰어난 품질을 구현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다. 거창의 산골에서 묵묵히 포도를 키우고 술을 빚는 이들의 행보는 한국 와인이 나아가야 할 진정성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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